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토리오 포초 (문단 편집) ==== 30년대의 성공 ==== 1929년에 다시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이 된 포초의 첫 시합 상대는 [[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|포르투갈]]. 밀라노에서 열린 이 시합에서 이탈리아는 포르투갈을 6대1로 뭉개버렸고, 이 기세를 이어 1930년까지 개최된 중유럽 컵에서 우승하면서 감독으로서 첫 성공을 맛보았다. 대표팀에 오래 재직하다보면 여느 대표팀 감독이 그렇듯 [[아돌포 발론체리]] 같은 주축 선수들이 은퇴하는 어려움은 있었지만 포초는 흔들리지 않고 [[안젤로 스키아비오|스키아비오]]와 같은 새로운 선수들을 발굴하였고, 그러면서 아르헨티나 출신 오리운디들인 [[루이스 몬티]], [[라이문도 오르시]], [[엔리케 구아이타]] 같은 선수들도 설득시켜서 이탈리아 대표팀의 파란 유니폼을 입히는데 성공하였다. 그 와중에 토리노에서 [[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|오스트리아]]에 패배하는 등 어려운 시간도 있었지만[* 이 경기에서의 패배로 이탈리아 대표팀의 주축 수비수이자 주장이었던 [[움베르토 칼리가리스]]가 다시는 대표팀에서 활약하지 못했다.] 꾸준히 [[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|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]]을 준비하였다. 그렇게 새로운 얼굴들이 대거 수혈된 이탈리아 대표팀은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. [[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|초대 월드컵]] 당시 이탈리아는 여느 유럽팀들과 마찬가지로 불참했는데, 그 동안 포초는 전술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. 그 결과로 포초는 당시까지 대세였던 단순한 평면 2-3-5에서 센터 하프를 앞으로 좀 더 빼고 인사이드 포워드를 내려서 포메이션에 변화를 주었고, 중원 싸움이 가능하게 만들었다.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[[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|분더팀]]의 감독 [[후고 마이슬]] 역시 비슷하게 센터 포워드 [[마티아스 신델라]]를 내려 [[폴스 나인]] 전술을 사용하였고, [[잉글랜드|물 건너]] [[아스날 FC]]에서 W-M 포메이션을 만들어 아스날 최초의 전성기를 이끈 [[허버트 채프먼]]과 함께 30년대 축구에 대변혁을 일으켰다. 이 메토도 전술의 핵심은 아르헨티나 출신 센터 하프 루이스 몬티, 인사이드 포워드 듀오 [[주세페 메아차]], [[조반니 페라리]]의 존재였다. [[1938 FIFA 월드컵 프랑스|1938년 월드컵]]을 준비하던 당시 이탈리아 대표팀은 [[1936 베를린 올림픽]]에서까지 우승을 차지했으며 1935년 10월에 [[체코 축구 국가대표팀|체코슬로바키아]]에 패한 것을 제외하면 무패 행진을 달리면서 순항중이었다. 스키아비오, 오르시, 구아이타, [[잔피에로 콤비|콤비]], 칼리가리스, [[비르지니오 로세타|로세타]] 등 많은 선수들이 1934년 월드컵을 끝으로 대표팀을 떠났지만 [[실비오 피올라]], [[지노 콜라우시]], [[알도 올리비에리]], [[피에트로 라바]] 같은 새로운 얼굴도 들어왔고, 이들의 활약으로 이탈리아는 월드컵 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대기록을 수립하였다. 이 기록은 현재까지 [[펠레]], [[가린샤]], [[지지(축구선수)|지지]], [[니우통 산투스]], [[자우마 산투스]] 등이 활약한 최전성기의 [[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|브라질]]만이 같이 가지고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